정 광(고려대 명예교수)
중국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알타이 민족들은 교차적 문법 구조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였다. 소위 알타이어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언어는 교착어로서 문장의 구성이 어순보다는 다른 문법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문장 속에서 각 단어들의 관계를 밝혀주는 어미와 조사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였다. 이러한 언어를 표기하는데 표의 문자인 한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한자는 문장의 구성이 주로 어순(語順)에 의존하는 고립적 문법구조의 상대(上代)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발달한 문자다. 이 언어에서는 문장 속에서 각 단어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어미와 조사가 발달하지 않았고 각 단어들은 어순에 의거한다. 언어학의 유형론에서 고립적인 문법 구조의 언어로 알려진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자생적으로 발달한 문자가 한자라고 볼 수 있다.
한자는 황하(黃河)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가장 강력한 문자로 등장한다. 중국 주변의 교착어인 알타이제어도 역사가 시작할 때에는 한자로 기록되었다. 이 민족들은 유교(儒敎)의 경전을 통하여 한자의 한문을 배우고 그것으로 자민족의 언어를 기록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언어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당연히 많은 불편이 따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문자를 제정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새로운 문자를 제정할 때에는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한자를 이용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주로 한자를 변형시켜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는데 알맞은 문자를 표기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이용한 문자로는 고구려 문자를 비롯하여 발해, 일본의 가나(假名), 거란(契丹), 서하(西夏), 여진(女眞) 문자가 있었다. 고려의 구결(口訣) 약자도 그러한 계통의 문자로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서양의 표음문자를 빌려 사용하는 방법이다. 서양의 북셈(Northern Semitic) 문자의 하나인 고대 아람 문자(Aramaic script)에서 발달한 소그드 문자(Sogdian script)가 소그드 상인들에 의하여 동아시아에 유입되어 위구르 문자(Uighuric script)가 되었다. 이를 몽고의 칭기즈 칸이 차용하여 몽고어를 적게 하여 몽고-위구르(Mongol-Uighuric) 문자가 시작된다. 이 문자는 초기 몽고의 여러 칸국(汗國)에서 사용하여 널리 퍼져나갔으며 오늘날에도 몽골 인민공화국의 공식문자로 사용한다. 그리고 후일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받아들여 청(淸)의 만주어를 기록하는 문자가 되었다.
세 번째의 방법으로는 스스로 새로운 표음 문자를 제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의 유입으로 일반화된 불경(佛經)의 문자인 범자(梵字)의 영향이 컸다. 고대인도의 범자는 베다(Vedic) 경전의 산스크리트어, 즉 범어(梵語)를 기록하던 문자였으나 불경이 이 문자로 기록되면서 불교를 받아들인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에게 친숙한 문자가 되었다. 이 문자는 한자와 달리 표음 문자였고 이로부터 한자 표기가 어려운 여러 민족들이 표음 문자를 스스로 제정하게 된다.
범자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표음 문자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7세기 중엽 토번(吐蕃) 왕국의 송첸 감보(Srong-btsan sgam-po) 왕이었다. 그는 톤미 아누이브((Thon mi Anu’ibu)를 시켜 서장(西藏) 문자 30개를 만들었는데 이 문자는 매우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표음 문자여서 당시 주변의 다른 민족들의 언어도 이 문자로 표기되었고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티베트의 음절 문자이다.
이 서장(西藏) 문자를 음소 문자로 바꾸어 원(元) 제국의 모든 언어와 한자를 표음할 수 있는 문자로 만든 것이 파스파 문자다.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帝國)에서 중국만을 분리하여 원(元)이란 새로운 국가를 세운 쿠빌라이 칸은 팍스파 라마로 하여금 서장(西藏) 문자와 같은 표음 문자를 만들게 하여 제국(帝國)의 국자(國字)로 삼았다. 중국 성운학에 의거하여 36성모(聲母)의 자음 글자를 만들고 당시 몽고어의 모음 체계에 맞추어 7개의 모음 글자를 만들어 모두 43개의 음소 문자를 만들었으나 실제로는 41개의 문자만 사용하였다.
한글도 파스파 문자와 같이 표음 문자로 제정되었다. 처음에는 우리 한자음, 즉 동음(東音)의 표기를 위하여 28자를 만들었으나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위하여 초성, 즉 반절상자로 27자를 만들고 한음(漢音)을 표기하기 위하여 32자까지 자음을 표음하는 글자를 만들었다. 여기에 중성 11자를 더 하면 43자로 앞에서 살펴본 파스파 문자의 글자 수와 같아진다. 그러나 실제 우리말과 우리 한자음, 그리고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많은 글자를 더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 특히 교착적 문법구조의 알타이제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은 한자문화에 동화되어 소멸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한자가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알타이 제 민족에서 서로 교류하였고 영향을 주었으며 한글도 이러한 영향 아래에 제정된 표음 문자로 보아야 한다.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제정된 언문(諺文), 즉 한글은 처음에는 중국의 한자음과 우리 한자음과의 차이에 고민하던 세종이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인위적으로 제정하고 이러한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한 표음 문자로 제정되었다. 변음토착(變音吐着)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사용된 훈민정음은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에서 우리말 표기로 발전하였고 우리 한자음 표기에도 사용되면서 언문(諺文)이라 문자 명칭을 얻었다.
대한제국 시대에 일시적으로 국문(國文)으로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에 다시 언문(諺文)이 되었고 당시 독립운동으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던 조선어학회에서 1930년대 이를 ‘한글’이라 불렀으며 남한에서 이를 문자 명칭으로 채택한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Hangul’로 굳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에서는 ‘조선글’로 부르거나 ‘우리글자’로 부른다. 한글을 ‘한국의 글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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